재스퍼 3일차.
2023년 10월 5일 목요일.
오늘 역시 날씨는 초오오오오오온나 쾌청!! 그 자체였다.
날씨 운 드럽게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축복된 일정이라 생각한다.
그래. 오늘 예약했었던 크루즈 투어를 못가면 또 어떠랴.
하루종일 숙소에서 머물며 힐링의 시간을 갖자.
포기하면 이리도 맘이 편하거늘.
무소유의 삶. 그래. 그것을 조금이나마 느낀 것 같다.
그래 맞아. 숙소에서 머무는게 제일 좋아. 난 지금 하루 60만원짜리 액티비티를 하고 있는거야.
가만히 있는게 가장 효율적인 나는 정신승리로 무장한 패배자다 ㅠㅠㅠ.
잘 마시지도 않는 모닝커피 한잔을 때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뭔가 주어진 야외 탁자가 있으니, 활용하고 싶었다.
오전에 살짝 흐릿하긴 했지만 괜찮아.
오늘 할거 없었으니까.
그냥 하루 쭉 쉬며 객실에만 머무를 생각이었지만,
흠.... 잠깐 거닐기로 했다.
날씨도 선선한게 산책하기 좋았고.
그냥 뭐 설렁설렁 생각없이 바깥으로 나왔다.
맑디 맑은 Beauvert 호수
보버트 호수는 재스퍼 파크 랏지 앞마당에 남쪽으로 위치한 호수다.
이런 식으로 되어있으며,
트래키이 코스 길이 고르고 관리가 잘 되어있어서 그런가, 아침부터 구보뛰는 사람들이 간혹 보였다.
살짝 걸으니 바로 날이 맑아졌다.
물 역시 하늘처럼 맑아서 바닥의 자갈이 훤히 드러나고,
비싼 숙소에서 관리하는 것 답게 쓰레기가 없이 청결하다.
딱히 이 호수를 한바퀴 돌 생각을 한건 아니었다.
그냥 반도처럼 튀어나온 곳만 돌고 객실에 귀환할 생각이었다.
다만 예상치 못했던 미지와의 조우는 나를 남은 트래킹 코스로 이끌었고,
씻지도 않고 잠옷차림으로 호숫가를 따라 죽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크와의 조우
그 미지의 존재는 바로 엘크Elk였다.
괜히 있던 표지판들이 아니었다.
재스퍼 파크 랏지에는 야생 엘크들이 돌아다닌다.
그냥 코스를 따라 쭉 걷고 있는데, 뭔가 오묘하게 쎄한 기분이 드는거.
흠..... 뭐지? 뭔가 이상한데...으응???? 쫌만 들어가보자.
와 ㅅㅂ 어케 찾았누.
내가 봐도 이건 쩔었다. 어떻게 대가리만 나온걸 딱 포착했냐.
처음엔 사슴인 줄 알고, 뭐 이렇게 큰 사슴이 있담? 하면서 접근했다.
근데 얘가 일어날 생각도 안하고 그냥 주둥이를 우물거리며 그냥 있는거.
흐음...
그렇다. 난 이와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12년 전 캔모어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 수컷 사슴과 조우한 적이 있는데, 그 사슴은 날 피하지 않았었다.
'초식동물 따위가 왜 잡식동물인 나를 보고 도망치지 않을까?' 하며 곰곰히 생각하다가 난 이내 패달을 힘껏 밟아 도망쳤었다.
아 그렇구나. 싸우면 내가 지는구나.
얘도 마찬가지 생각이겠지.
싸우면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저만큼이나, 거의 한 5m까지 접근했는데도 쌩까고 있는거겠지.
야.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그래. 차라리 낫다. 덕분에 오래오래 구경할 수 있었으니까.
저거 보소 저거!!!
목구멍이 꿀렁 올라왔다가 다시 삼키는 저 모습!!!!
엘크 역시 소와 마찬가지로 굽이 벌어진 '우제류偶蹄類'인지라 되새김질을 하는 것 같았다.
와 완전 신기!!
역시 캐나다!! 대자연!!! 이 맛에 로키에 왔다!!
얘를 구경하던 중, 나이가 지극하신 중국인 여성과 그녀의 캐나다 남편과 만났다.
그들은 호숫가를 따라 트래킹중이었는데,
나에게 저건 사슴이 아니라 엘크라는 것도,
암컷이라 뿔이 없고 크기가 비교적 작은 편이라는 것도,
호수 맞은편에 숙소가 있는데 거기 엘크가 엄청 많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호오.
나는 엘크를 더 보고 싶어.
그럼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호수를 한바퀴 돌게 되었다.
...씻지도 않고.
잠옷차림으로.
모자를 쓰고 운동화를 신은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쾌청한 날의 호수 한바퀴.
트래킹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걸었다.
둘레길, 올레길, 통가리로 크로싱 등등 크으... 역시 걷는건 즐거워.
바람도 없어서 수면은 잔잔했고, 하늘이 비친 호수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먼저 출발한 중국/캐나다인 중년부부를 따라간다.
역시 머릿수가 많아지니 곰에 대한 걱정이 확연히 줄어든다.
여긴 살짝 제주 올레길이 생각나는 구간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재스퍼 파크 랏지.
여기가 거의 딱 JPL의 맞은 편이다.
이야 하늘의 맑음이 살벌하구만!!!!
어제 왔던길대로 호수 동쪽을 타고 JPL로 귀환했다.
한바퀴를 도는데 대략 1시간정도 걸린 여정이었는데,
엘크를 만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보람찬 한바퀴였다.
중국인 여사님이 말했던 엘크의 무리는 만나지 못했지만, 야생동물이 그렇지 뭐.
아 쫌!!! 니들은 하아.....
이 깡패쉐키들 진짜 어떡하지????
정오 즈음부터 저녁때까지 햇살이 더욱 강렬해져서 뭔 사진을 어떻게 찍어도 예쁘게 나왔다.
겸사겸사 엘크도 다시 보러 갔다.
저 위치가 내 객실과 그래도 쪼금 가까운 편이라 다시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거의 4시가 되었는데도 저기서 저러고 있었다.
아, 다만 이제는 좀 졸면서 저러고 있더라.
한밤중의 소란.
밤에 창가쪽 테이블에서 컴퓨터를 두드리는데 뭔가 창밖으로 강렬한 기척이 느껴졌다!!!
이렇게 강렬한 기척이.
블라인드 사이로 급하게 찍은 사진에는, 양옆으로 뿔이 벌어진 수컷 엘크의 매력적인 궁뎅이가 박혀있었다.
와 ㅅㅂ! 이건 놓쳐선 안돼!
...하며 바깥으로 나와보니, 이미 반대쪽 카빈의 투숙객은 촬영하고 있었고,
수컷 엘크는 호수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사진이나 영상에 찍힌건 수컷엘크 한마린데, 암컷들과 어린 엘크들을 데리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사슴이니까 무리를 지어서 다니겠지.
근데 낮에 봤던 그 엘크는 왜 혼자 그렇게 있었을까?
아픈걸까? 낙오된걸까? 지금 쟤네들이랑 같이 있는걸까?
모르겠지만 뭐 내 걱정없이도 잘 살겠지.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너네들이 한밤중에 돌아다니면서 똥을 한무더기로 싸내고,
낮의 기러기 똥과 더불어
여기 사방팔방을 똥밭으로 만드는거였구나.
모든 것이 이해가 갔고 수수께끼가 풀렸어!
.....에효.... 인간이 어찌하리. 대자연이 그러한 것을.
여튼 진짜 마지막까지 알찼던 JPL에서의 하루였다.
비싼 숙소라 내심 속이 많이 타들어갔었는데,
이 정도의 이벤트와 그에 따른 만족감에 아쉬움없이, 즐거운 추억으로 JPL을 마음속에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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