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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까지의 인생정리

[인생정리27] 실패, 좌절 그리고 시간낭비. 되는 일이 없던 2018년의 여름.

아스라이39 2021. 3. 1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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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후 가히 내 인생 최대 암흑기는 2018년 여름이라고 할 수 있다.

뉴질랜드에서도 좌절스러웠고, 아일랜드에서는 실패했지만, 2018년의 한국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귀국후 올림픽 선수촌에서의 한달근무까지는 성공적이었다.

나름 보람차게 일을 했고, 수입도 좋았으며 무엇보다도 나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고무적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나의 행방은 그야말로 대 실패다.

뉴질랜드? 아일랜드? 그런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실패다.

 

뉴질랜드나 아일랜드에서는 실패의 원인과 결과가 뚜렷하여 반성하고 개선해나갈 수 있었다.

....물론 이건 자아성찰의 측면에서 개선할 수 있었던거지 워홀생활에서의 실질적인 개선은 할 수 없었다.

고작 1년의 기한이 있는 곳에서의 1회성 반성인지라 후일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 두 나라에서의 실패는 나에게 자양분이 되어 나의 태도나 가치관 등에 영향을 미쳐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

 

사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의 고난은 예견되었던건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 한국에서의 경험이란,

편의점 알바 4개월.

등록금을 벌기 위한 횟집 주방 10개월.

영업직 6개월.

이게 근로경력의 전부였다.

오히려 외국에서 더 일을 오래 했다.

즉, 우리나라에서 나는 아직 경험치가 낮은 애송이이며, 2018년을 매우 실패적으로 보내게 됐다.

 

그리고 호주에서부터 도돌이표인 생각이지만, 결국 나 자신보다는 '사람'을 잘 만나야 무난하게 살 수 있음을 깨달았다.

 

2018년 4월 이후 나의 발자취는,

 

오산 공장 1달- 서울 온수 공장1달 - 전단지알바 보름 - 이천 하이닉스 노가다 2달 

 

의 실패를 겪은 후 9월에 이르러서야 영등포의 한 호텔에서 비로소 안정적이게 된다.

 

 

Ch1. 오산. 사수가 나한테 일을 미뤄서 지쳐서 관둠.

 

처음에 오산으로 간 이유는 단순했다.

뉴질랜드에서 실패 후, 나에게 호주를 가기 위한 밑천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어줬으며, 대개 숙식이 제공되므로 돈 모으기가 쉽다.

이 단순한 이유였다.

일은 과연 빡셌다. 하지만 자신은 있었다.

나는 아직 열정적이었으며,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2019년에 캐나다로 가기.

동기가 뚜렷하다는 것은 삶의 태도를 성실하게 해준다.

 

하지만, 역시나 사람이 문제였다.

나의 사수는 자신의 일을 나에게 내팽개쳤고, 본인은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돕더라.

아니 이상한게, 자기 일을 마치고 남을 돕는다면 모를까, 왜 나한테 폐를 끼치냐구요.

나의 업무는 나날이 늘어만갔고, 사수는 계속 나에게 일을 넘겼으며, 나의 실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지쳐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괜찮았다. 내가 실수하더라도 덮어주고 위로해주며, 앞으로 나와 같이 해나갈 생각인 것 같았다.

나의 나이는 30대 초반. 

보통은 뭔가를 하고 있거나, 좀 늦은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어딘가에 진득히 붙어야 하는 나이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음... 이런 표현 좀 그렇지만 키워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한달만에 관뒀다.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1년정도는 일만하며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오산으로 갔던거였는데 너무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Ch2. 온수. 무책임한 아웃소싱 업체와 오만한 공장 책임자의 콜라보로 라인이 없어짐.

 

다음으로 한달간 온수에서 화장품 공장에 갔는데, 라인이 없어져서 쫓겨났다.

게다가 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업체에 임금에 대한 문의를 해보니까, 말도 안되는 핑계 즉, 거짓말을 하며 그게 맞다고 둘러댄다.

피곤해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아마 이때 쯤 나의 정신상태는 그리 온전하지 못했을거다.

 

온수 화장품 회사는 집에서 전철로 갈 수 있고, 야간근무라 그나마 돈을 좀 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그리고 오산에 비해 안좋았던 점은 상여금이 없다는 것.

서울 경기권에서 대부분 그렇다고 들었다.

그래서 몫돈을 쥐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다.

 

인력업체는 무책임했다.

우리는 새로 운영되는 야간 근무조였는데, 결근자들이 늘어만갔고, 몇달동안 유지된다고 하던 야간라인은 결국 한달만에 폐쇄되었다.

일하는거 힘들었다.

하지만 뭐 공장일 힘든거야 매한가지라는 생각에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팀내부에서부터 무너지는 신뢰는 일할 의욕을 감퇴시켰다.

 

여튼 뭐... 난 여기 괜찮게 생각했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1달의 근무 후 다른 일을 찾아야만 했다.

 

Ch3. 강남에서의 전단지 알바.

 

6월에 보름동안 강남에서 전단지알바를 했다.

부질없는 시간. 낮은 임금. 하지만 뭐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가늠을 못하고 있던 시기였다.

모델하우스? 아파트를 파는 뭐 그런 사무실이었던 것 같은데, 흠... 너무 머릿속을 비우고 일했던지라 지금도 딱히 별 생각이 안든다.

 

Ch4. 친구를 믿지 말자. 이천 하이닉스 공사장.

 

 

그렇게 방황하던 중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랑 같이 일하자고.

이천에서 노가다를 하는데, 한달에 400씩은 받는다는거다.

난 미끼를 덥석 물었고, 이 선택이 최악의 선택이었다.

두달동안 돈도 얼마 못벌고, 일은 죽도록 했으며, 멘탈은 바닥까지 털렸다.

 

친구가 보장한 업체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전기배선을 까는 업체에 들어갔는데, 전기 배선일이라기보다는 노가다였다.

건물 천장으로 배선이 지나갈 통로를 설치하는건데, 철을 자르고 조립하고 밀고 연결하고, 와아... 힘들긴 힘들더라.

그래도 근무체계가 잘 잡혀있어서 쉬는 시간 보장되고, 음.... 장점이 있었나.... 아 밥은 엄청 잘나왔었지.

그리고 살도 엄청 빠졌었다. 2018년의 여름은 살인적인 기록을 만들어냈던.. 그래. 40도도 넘어갔었지? 그런 여름이었고 난 노가다를 하고 있었다.

 

임금은.... 그럭저럭했다.

친구가 보장한 400은 꿈도 못꿨다.

아니.. 애시당초 그 친구는 자기가 들어갈 업체에서 팽을 당한 것 같더라. 하아.... 머리가 아팠지만, 그래도 전진하기로 했다.

 

여기서 일하며 많은 단점들이 있었지만 그중 최악의 단점은 바로 내 친구였다.

그 친구가 날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못살게 굴 줄은 몰랐다.

걍 나를 하인다루듯이 굴었고, 자꾸 컨트롤하려고 하더라.

그래도 15년지기 친구였는데 여기서 오만정 다 떨어지고, 앞으로 웬만하면 상종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굽신굽신거릴 정도로 그 친구가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가 가장 맞는 이유인 것 같다.

항상 자기가 올바른 선택을 한다고 나에게 어필하지만, 그가 한 실수나 허술한 면은 곧이곧대로 다 보이고 있었다.

 

학창시절에는 절대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내가 공부를 잘해서 그랬을거다.

어딜 가든 자기보다 잘난 사람한테는 함부로 못하고, 자기보다 못나보이면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게 내 친구라는 점에서 많이 화가 났다.

 

결국 그 친구는 나를 남겨두고 보름만에 다른 업체로 옮겼다.

용접. 돈은 좀 되지만 위험하고 험한 일을 하는 업체였다.

나에게는 한달이라도 버티라며 신신당부해놓고서는 보름만에 줄행랑이라니...

사실 그 친구는 업체를 옮기기전, 나에게 자꾸 자기가 다른 업체로 간다고 떠보더라.

아마 나도 같이 따라가길 바랐던 것 같은데 절대 그럴 일은 없지. 니가 나한테 한게 있는데. 분명 니 시다바리 시킬텐데 미쳤다고 따라가냐. 지금 너때문에 여기온 것도 빡돌아 죽겠는데.

이렇게 말하진 않고, 좋은 말로 그래. 잘 됐네. 돈 만이 벌어야지. 가. 라며 이동을 장려했다.

그 친구가 나가고나서 좀 더 나은 근무여건이 되었다.

소규모 팀이었다. 그 친구를 제외하니 좋은 사람들만 남았고, 떠날 때에도 좋게 헤어졌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래도 일 좀 가르친 애가 떠난다니 불편했겠지만, 뭐 노가다에서 사람이 돌고 도는게 그렇지.

 

딱 두달을 채우고 나는 이천을 떠났다.

그 친구가 보장한 쉬운 근무, 높은 임금이 실행되지 않았으므로 거기에 더 있을 이유는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도 정말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그 친구에게 감사한 점도 있다.

그 친구가 나의 출퇴근때 차를 태워다줬는데, 다른 업체에 가고나서도 계속 픽업해줬다.

이건 진짜 인정. 두달동안 딱 4번 못태워주긴 했는데, 그정도야 이해해야지. 얻어타는데.

하지만 딱 그정도의 감사함이었다.

2018년은 내 인생에서도 최악의 해였고, 그 중에서도 최악의 두달을 보내게 한 그 친구가 밉다.

 

Ch5. 월 300만 주면 여기서 평생 일하고 싶어요 ㅋㅋㅋ

 

당연히 농담이다. 월 300이 어디 쉽나.

그냥 호텔에서 일하며 소장님한테 장난으로 던지는 말이었다.

월 300만 주면 이민 안가고 여기서 평생 일하고 싶다고.

그럼 소장님은 야! 나도 300못받어 ㅋㅋㅋㅋㅋ 하며 웃어넘기셨다.

 

이천을 빠져나와 영등포에 있는 한 호텔에 정착했다.

집에서 도보 10분, 전철 10분, 도보 10분. 도합 편도 30분거리에 있는 호텔이었다.

그동안 해외에서 해온 일이 있으니, 전공을 살려 호텔에서 일해볼까하다가 지원하게 되었고, 일하게 되었다.

 

사실 이 호텔은 이천에 가기 전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6월 말인가 여기 자리가 난 것을 체크했었는데, 그 때에는 월 400이라는 꿈에 부풀어있었다.

만약 그 때 들어갔으면 좀 더 괜찮은 2018년을 보냈겠지.

호텔은 최저임금으로 돈은 잘 못벌었었지만, 만족스러운 근무환경에 괜찮은 사람들과 함께 일했었다.

 

2018년 9월에 시작하여 2019년 6월까지 일했었다.

연말에는 정말 힘들었고, 새해에 업체가 바뀌며 어수선한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뭐... 괜찮은 시간이었다.

코로나 전이라서 딱히 불황이라는 생각도 안들었었고.

2018년의 거듭된 실패와 친구에 대한 실망 등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내 멘탈에 안식처와도 같은 근무지였다.

그래서 항상 저렇게 이야기하고 다녔나보다. 월 300만 줘도 여기서 평생 일할텐데 ㅎㅎㅎㅎ...... 아니 일단 돈은 벌어야되니까! 최저임금으로는 내 노후가 암울해진다구.

 

 

6월까지만 일했다.

그리고 7월에 종로파고다에 다니며 아이엘츠를 준비했고,

8월 초에 시험을 쳤다.

다행히 오버롤 6.0이 나왔다.

일반적인 유학을 계획하는 사람들이라면 6.5 이상이 나와야하지만, 내가 갈 곳은 고작 1년짜리 컬리지 MITT였다.

MITT를 졸업한 후 받을 PGWP가 목표이기에 나에게는 6.0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다행히 졸업을 무사히 마쳤고, PGWP를 신청하기 위해 졸업증과 성적증명서가 우편으로 오길 기다리고 있다.

 

9월과 10월에는 서울 둘레길을 돌며 방탕하게 지냈다.

어짜피 2020년 초에 입학할 생각이었던지라 그냥 생각없이 놀았다.

11월,12월에는 제주도에 가서 살았다.

원래는 2월까지 있을 생각이었는데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계획보다 일찍 철수했다.

 

글로 써보니 생각보다는 별거 아닌 2018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안그랬지. 엄청 스트레스 받았고 방황했었다.

2019년이야 무난했으니 상관없지만, 2018년은 으... 생각도 하기 싫은 별로인 해였다.

 

아, 2018년에 주식도 망해서 700만원정도 날렸는데, 지금은 어느정도 복구해서 200~300만원만 적자다.

...망할 이거 빼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하고 죽겠다 아주.

...진짜 최악의 해였다.

 

그리고 2018년의 실패로 인해 나의 유학계획은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밀렸으며,

캐나다 입국 몇달전에 터진 코로나때문에 이것저것 번거로운 일이 많이 일어났다.

 

출국하기 전 영등포 호텔에서 다섯달동안 근무하고 떠났다.

나의 유학사정을 다 아니까, 관리자들이 3월까지만 일하고 가라고 해줬는데 비행기 취소되고 어쩌고 하다보니 5월까지 일할 수 있었다.

물론 코로나때문에 온전한 풀타임으로 일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돈을 까먹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시간이었다.

진짜 여기에서 일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두고두고 생각할 것 같다.

나중에 진짜 성공해서 찾아뵈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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