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주올레길을 완주했던 시기는 2019년 말이었다.
즉, 지금과는 몇몇 달라진 것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올레길 2코스의 중간지점이다.
내 제주올레 패스포트에는 중간스탬프가 있는 곳이 '홍마트 성산점'이라고 되어있는데, 현재 제주올레 싸이트에서 검색해보면 '제주동마트'라고 표기된다.
당시 둘레길 루트가 한창 공사중이었는데, 지금은 길이 잘 닦여 여행자들을 조금이나마 더 편하게 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주 올레길의 변화는 하루이틀일이 아니었으며, 그에 따라 완주 후 또 완주를 하더라도 보고 느끼는 바가 더러 달라질 것도 같다...... 하지만 다시 돌진 않을 것 같음. 두달은 잡아야되는데 너무 시간이...
해안가와 내륙, 마을길, 갈대길, 저수지 등
다양한 구경거리를 갖춘 밸런스 있는 코스.
소요시간 : 12:30 ~ 16:45 (4시간 15분)
길이 : 15.2km
"물빛고운 바닷길부터 잔잔한 저수지를 낀 들길, 호젓한 산길까지 색다른 매력의 길들이 이어진다.
대수산봉 정상에 서면 시흥부터 광치기 해변까지 아름다운 제주 동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1코스를 마치고 바로 2코스로 돌입했다.
1코스 초반부터 오름을 두개나 올랐고, 성산일출봉까지 등정하여 체력상태가 이만저만 심각한게 아니었다.
특히나 길이가 짧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15km의 행군 후, 다시 15km를 행군해야한다고 생각하니 죽겠더라.
그리고 오전과 오후를 경계로 체력이 극명히 갈리는 이러한 루틴은 제주 올레길을 모두 돌 때까지 지속되었다.
아름다운 광치기해변에선 여러 커플들과 귤파는 현지인들이 있었다.
근데 20분만에 중간스탬프가 나온 것이다!!!
음?? 뭐지??? 내 예상으로는 2시간은 지나야 나올텐데???싶어서 지도를 확인해봤더니...
... 2코스의 초반에는 '지름길'과 '돌아가는 길'이 있는데, 난 지름길로 온 것이었다.
당연히... 정식루트는 '돌아가는 길'이다.
저수지를 건너 '신산봉'을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는 긴 길이 정식이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둘 다 정식루트긴 한데 흐음.... 난 이런 경우에는 긴 길을 선택하는 편이라서...
빡치는 마음을 뒤로 하고 일단 밥부터 먹는다!
아직은 욕먹지 않던 2019년의 맘스터치. 맛있당.
식사를 마치니 시간은 1시 7분.
아 진짜... 걍 집에 가버릴까 하아..
그냥 눈앞의 중간도장을 찍고 2코스를 쉽게 끝내버리는 수도 있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하아..
되돌아간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되돌아가서 음... 추억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역시 돌아가야 멀리 보는군.
빡치는 와중에 아름다운 성산일출봉.
원래는 등지고 나아가야하지만 잠시 뒤돌아서 간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식산봉.
역방향으로 가니까 눈앞에 해가 없어서 눈이 안부시네 하하하하.
아니 근데 당시에는 여기가 공사중이라서 길이 아예 없었다.
이정표는 분명 있긴 했고, 그걸 못본 내 잘못이 크긴 한데, 길이 이렇게 생겼는데 어떻게 알아.
조선시대 때도 개척하고, 박통때도 개척했다는 곳인데, 지금은 물썪은내가 진동하는 내수면.
식산봉.
야트막한 언덕수준이라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주 그냥 계속 나와.
2코스 돌아가는 길을 스킵하지 않은걸 잘했다고 생각했던게 바로 이 음식점때문이었다.
1~2년전에 이 근처 에어비앤비에서 묵었던 적이 있는데, 마을구경하다가 우연히 들렀던 곳이 바로 여기다.
고기국수.
난 여길 다시 보기 전까지 제주시에서 먹은 고기국수가 내 생애 최초인 줄 알았는데, 이미 1~2년전 여기에서 고기국수를 먹어봤었다.
동네 어르신들이 호기심때문이가 말도 거시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어르신들이 길도 알려주시고. 역시 말동무가 있는게 재미있긴 한 것 같다.
하지만 하루에 두코스씩 주파해야하는 나에게 담화는 사치다.
부리나케 앞으로 나아갔다.
망할. 아까 왔던 거길 다시 왔다.
어휴. 중간도장을 얼른 찍고, 해가 지기 전에 마지막 도장을 찍길 바라며 앞으로 나아갔다.
둘레길 중간중간에는 이렇듯 귤 무인가판대가 더러 보인다.
아, 물론 죄다 귤밭이기도 했고, 무례한 여행객이 많았는지 귤밭에 훔쳐가지 말라는 문구도 많이 보였다.
가판대에서 귤 1봉지를 사서 먹으면서 갔다.
역시 현지 특산물. 너무 맛있어.
크으 그러고보니... 검은 흙이나 화산섬이라는 특성, 그리고 길가의 무인판매대까지.
제주도는 뉴질랜드랑 비슷한 점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저기는 대수산봉.
그리 높게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가보면 개빡세다.
너무 좋당.
탁 트인 시야가 너무나도 좋다.
불가리아 플라브디프 생각도 난다.
서울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위험한 길도 있으니 조심 또 조심. 주의해서 가자.
메밀밭인가.
드디어 2코스의 마지막 지점인 '혼인지'까지 왔다.
해가 뉘엿뉘엿했지만 다행히 아직 완전히 기울어지진 않고 있었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7호
혼인지는 탐라국의 시조인 삼신인이 지금의 성산읍 은평리 바닷가에 떠밀려온 나무상자 속에서 나온 벽랑국 세 공주를 만나 혼인한 곳으로 알려진 연못이다.
느낌있는 돌벽과 간세.
간세 뒤의 저 느낌있는 돌벽은 환해장성이라는 돌성벽이다.
진도에서 퇴각하는 삼별초가 탐라로 들어오는걸 막기 위한 역사적으로 탐탁치 않은 건축의도를 가진 성벽이지만, 나중에는 왜구를 막는데에도 쓰인다.
세기말도 아니고. 저건 인터스텔라의 블랙홀같이 생겼는데?
그냥 아무 사진만 찍어도 그림같이 나온다.
역시 자연과 벗삼아 살아가는 안분낙도의 삶은 지향할만하다.
수고하셨읍니당~
2코스 완주는 4시간이 약간 넘었다.
초반의 그 뻘짓거리만 안했어도 30분정도는 아꼈을테지만, 어쨌든 해가 떨어지기 전에 끝나서 만족했었다.
간세 스탬프함은 지도상으로 '동포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온평포구. 제주의 5시쯔음에 위치한 포구다.
여기서 제주시인 집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고 시계반대방향으로 쭈우우욱 3시간동안 가야한다.
하아... 피곤해 죽겠는데 집에 도착하려면 3시간을 더 가야 하다니 어휴.
게다가 은평포구에서 버스정류장으로 가려면 15분정도를 걸어 도로가로 가야 한다.
아니... 어휴. 아까 혼인지에 버스정류장 있긴 했는데...
걍 거기서 버스타고 퇴각했다가 다음에 3루트를 시작할 때 2루트 마지막 도장을 찍고 나아가도 될 듯.
아 물론 시작점과 종점의 간세에는 스탬프가 두개 들어있다.
그러므로 지금 3코스 시작스탬프를 찍고 나중에 3코스 중간 스탬프부터 코스를 돌아도 되기는 된다.
하지만 그런 반칙은 이미 서울 둘레길때서부터도 안했고, 제주 올레길을 완주하는 그 순간까지도 안했다.
버스정류장으로 나와 근처 CU에서 파워에이드를 사서 벌컥벌컥마셨다.
사실 화장실이 있으면 이용하고 싶었는데... 없다고 한다.
2코스의 마지막 화장실은 혼인지에 있었고, 온평포구에는 화장실이 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뱃속관리는 그때그때 했어야 하는 것을. 방심했군.
201번 버스를 타고 제주시로 돌아왔다.
학생들의 하교시간과 겹쳐서 버스안은 헬 그 자체였고, 캐리어를 든 여행자들도 많았으며, 교통체증도 있었다.
저녁의 제주가 이리도 무섭습니다.
425km대장정의 하루가 저물어갔다.
지금이야 추억이 새록새록 돋지만, 그 때는 정말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왕 시작한거 빨리 끝내버리고 싶다'라고 적어놓은걸보니, 그만큼 한국인이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