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를 갔던건 2011년이었다.
대학교 3학년 재학중 도대체 왜때문인지 이유도 모르게 나는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했고, 어느순간 내 손에는 워홀비자가 들려있었다.
처음 가보는 외국.
처음 가보는 워홀.
그리고 처음으로 준비하는, 나에게는 크나큰 도전이었지만, 군대 2년 2개월을 무사히 보냈다는 생각이 1년간의 해외살이를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심어주던 시기였다.
사실 나는 '우리나라 땅도 충분히 넓은데 뭣하러 외국까지 나가나'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내가 왜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지원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취직을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서라고 하는게 가장 이치에 맞을 것 같다.
어쨌든 다행히도 아직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우편으로 지원하는 시절.
나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의정부 우체국의 직원들과의 합작으로 9시1분 소인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세계를 향한 스타트, 내 인생을 한권의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나라를 잇는 다음 페이지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해외에 대해 무지했던게 다행이었던 것 같다.
학습된 루트가 있었다면 이렇게 다사다난하게 꽉 찬 1년을 보내지는 못했으리라.
다행히도 아무것도 모르는 나엿기에 과하게 걱정하고 쓸데없이 걱정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었다.
무식이 용감이라고 나는 겁도 없이 걍 무던한 마음으로 밴쿠버로 떠났다.
Ch1. 밴쿠버에서의 짧고 애매했던 두 달
밴쿠버로 갔던 것은 실수였다...고 하기에는 사진에서 보이는 예쁜 추억들이 많았다.
뭇 해외 초보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 대도시선택
- 어학원등록
- 홈스테이
를 했다. = 돈낭비를 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때의 나는 자립심이 컸던 것 같다.
어학원을 제외하고는 비행기표부터 시작해서 거주지까지 혼자서 했고, 그 덕분에 돈을 많이 아낄 수 있었다.
사실, 내가 부지런해서 돈을 아꼈다기보다는, 돈이 없어서 내가 부지런해질 수 밖에 없었다는게 맞는 말이지만.
어학원은 등록비가 가장 저렴한 학원으로 선택했었는데, 이 때 우리유학원의 도움을 받았고, 그 때의 도움이 꽤 유효해서 2020년 이민을 목표로 한 유학을 결심했을 때에도 우리유학원의 도움을 다시 받았었다.
어학원은... 당시의 나는 어학원을 가는 것이 필수인 줄 알았다.
물론 워홀비자 어디에도 학원을 다녀야한다는 조항은 없었지만, 막연히 나의 편향된 생각으로 당연히 학원을 나가야만 하는 줄 알았고, 그로 인해 돈낭비, 시간낭비를 했었다.
...하지만 어학원 인맥으로 알버타 캔모어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세상일은 역시나 새옹지마인 것 같다.
어쨌든 밴쿠버에서 지옥은 쉽게 다가왔다.
점점 바닥이 드러나는 잔고와 답이 없는 취업전선.
이 때 얼마나 비참했냐면...
돈이 없어서 월마트에서 파는 8개들이 베이글 한봉지를 사서 하루에 하나씩 먹었다.
그리고 나머지 배고픔은 물로 채웠다.
마지막 베이글을 들었을 때 빵에 핀 곰팡이를 보고 눈물을 흘릴 뻔도 했다.
이 이야기는 차후 한국에서 구직활동을 할 때 자소서 단골 에피소드로 넣었다.
홈스테이를 두달이나 예약해놓은게 실수였다.
최대한 짧게 했어야 돈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홈스테이를 2주로 설정해놓고, 룸쉐어를 찾았어야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다.
홈스테이 생활이 두달 째로 접어들 때 홈스테이맘에게 밥을 안해줘도 되니까 디스카운트해달라고 했다.
다행히도 친절했던 홈스테이맘은 내 요구를 받아줬고 취직을 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머물 수 있었다.
짧지만 추억이 많은 나의 홈스테이 집이었다. 조이스 콜링우드 역에 있었지 아마?
역에서 내리면 근처 피자집에서 피자를 먹곤 했지.
함께 지내던 일본인 노조미와 요시, 그리고 멕시코인 구스타보까지 합이 좋았는데...
이들이 떠나고 남미친구와 아랍친구들이 오면서 분위기가 좀 애매했었지 아마.
내가 홈스테이를 떠난건 손에 쥐어진 캐나다 달러가 20불정도 됐을 때, 다행히 잡을 구하고 나서였다.
아직도 기억나는 던스무어 스트릿과 시무어 스트릿 코너.
다운타운 중심가에 있던 A&W에서 그레이브야드를 뛰었었지.
밤에 클럽에서 나오는 수많은 인파를 주방에서 나홀로 막아내던 기억이 난다.
조건이 그리 좋진 않았던 일터였지만, 홈리스로 치닫고 있던 내 워홀생활에 반등을 줬던 고마운 햄버거집이었다.
정작 중요한 일은 예상치 못할 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A&W취직도 그랬지만, 홈스테이 시절 우리집에서 걸어서 5~10분거리에 친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우연이 있나.
이와 더불어 학원의 몇몇 친구들과 다같이 공동생활을 하게 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었다.
밴쿠버에서 더이상 발전이나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깨달은 나는,
어느정도의 금액만 만들어놓고 퇴사의사를 전달했다.
일한지 한달 반밖에 안되는 시점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고용주 입장에서는 떨떠름 하겠지만, 이 때 퇴사를 한게 내 워홀 히스토리에서 가장 잘한 일 같다.
이미 학원을 수료하고 로키산맥으로 건너간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취업전선에서 곤란을 겪고 있던 내 친구를 로키산맥으로 보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를 보낸 다음주, 로키산맥으로 넘어갔다.
비행기는 로키산맥 위에서 긴 시간동안 날았다.
산맥의 짧은 부분을 횡단하는 것인데도 몇분동안을 계속 날았다.
Ch2. 제대로 된 워홀의 시작.
로키산맥에서의 세달.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을 꼽으라면 캐나다 로키산맥에서 거주한 것이다.
내가 머물렀던 곳은 '캔모어Canmore'라고 하는 곳으로 밴프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아마 밴프나 레이크루이스같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가기 위한 사람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정도의 마을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단정짓기에 캔모어는 너무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한밤중에 숙소에 도착한 후 짐을 풀었다.
먼저 가 있던 친구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숙소 주위로 펼쳐져있는 대자연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향후 내 고향친구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자, 친구는 여기가 어디냐며 소스라쳤다.
이곳의 모습은 친구네 집 액자에 걸려있던 자연풍경과 너무도 흡사했다.
나는 헐리데이인에서 하우스키퍼로 일했다. 말 그대로 방치우는 일.
허드렛일이고 근무조건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껏 살면서 '그 순간'. 그 일을 하던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았던 때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는 나중에 뉴질랜드에서 체리딸 때와 비견하여 어느 쪽이 더 행복했었던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지만.
밤 10시30분이 되어야 급격하게 저무는 태양이나,
자전거로 출퇴근 할 때 보이던 코요태, 사슴, 그리고 미어캣마냥 땅굴에서 나와 주위를 망보던 다람쥐들까지.
물론 근처의 유수한 관광지들도 돌아보며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한여름날 불꽃놀이를 보며 친구들과 맞이하는 캐내디안 데이란....
집근처 그라시 레이크 Grassi Lake에서 찍은 사진.
이 사진 하나만으로도 캔모어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증명이 된다.
여름성수기는 곧 끝이 났고, 나는 8월 중순에 캔모어를 떠났다.
현재 캐나다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사실 다시 한번 이곳에서 삶을 살아보고 싶진 않은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 그리고 거짓말같게도 이듬해에는 내 고등학교 동창,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우연히도 이곳에서 워홀로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
위니펙 HI호스텔에서 만난 마크씨는 퀘벡주의 쉐브룩Sherbrooke출신으로 캐나다를 자전거로 횡단하고 있었다.
공무원이었던 그는 은퇴 후 살을 몇십키로나 감량하고 훈련하며 이번 횡단을 준비했고, 그는 결국 성공했다.
마크씨와는 향후 캐나다 동부여행을 하며 다시 한번 재회하게 된다.
Ch3. 캐나다 준북극권 오지라이프.
처칠에서의 세 달.
땅이 넓다보니 이동을 하는 것도 하나의 즐거운 설렘이 된다.
캔모어에서 버스를 타고 간혹 낭떠러지 길을 달려 재스퍼에 도착, 재스퍼에서 캐나다 횡단기차 Via rail을 탔다.
역무원 아저씨가 무례해서 열받긴 했지만, 기차 승무원 청년이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하며 친절하게 굴어서 기분이 다시 좋아졌었다.
비싸고 좋은 좌석에 탑승했다. 침대칸에 운이 좋아서 2인실을 혼자 쓰게 되었다.
위니펙에 도착한 후 즐거운 여름날의 겨울도시를 만끽했다.
다소 짧았던 위니펙 관광이 끝난 후 나는 비아레일의 북행노선에 올라탔다. 그리고 좌석에서 48시간을 견뎌내며 드디어 미지의 땅 처칠에 도착했다.
위니펙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HI호스텔에서 묵었었는데, 캐나다를 횡단하시던 노익장 마크씨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중에 다시 그의 고장인 퀘벡에서 재회하게 된다.
아 그리고... 48시간의 기차에서 보려고 했던 브로크백마운틴은 차마 내가 끝까지 볼 수 없는 영화였다.
처칠생활 정착에서 막대한 영향과 도움을 준 민들레꽃C님 감사해유. 나중에 꼭 다시 보고 싶구만.
처칠. 이 환상의 땅에는 이 해 유래없을 정도의 많은 한국인 워홀러들이 찾아왔다.
다들 어쩜 그렇게도 특색이 있는지 너무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하긴... 여기까지 찾아올 사람들이면 당신들의 도전정신은 가히 알만하지.
그렇게 그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오로라를 구경하고 북극곰을 구경했다.
여기서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현지 친구들과도 즐겁게 어울려 지냈다.
캔모어 라이프가 행복과 즐거움의 온상이었다면,
처칠라이프는 진정한 참여관찰이었던 것 같다. 한치의 과장도 없이 나는 캐나다인으로서의 삶을 누렸던 것 같다.
.....언어만 빼구.
나는 '처칠모텔'에서 일했다.
다행히도 처칠에 도달한 바로 그 날 제출한 이력서에 취직이 되었다.
사실 처칠은 인구 약 1000명정도의 작은 동네라 일할 곳이 한정되어 있는데, 아주 다행스러운 출발이었다.
나의 고용주 덕 로빈슨은 괴팍한 아저씨였다.
성격은 괴랄맞았지만 매사에 합리적이었고 친절하려고 애쓰는 티가 났다 ㅋㅋㅋㅋ 나를 많이 혼냈는데, 주눅도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는 나를 신뢰해줬다.
본인이 필리핀여행을 가는 한달동안 본인의 집을 나에게 조건없이 대여해줬다.
나는 캐나다 부자(?)의 집에서 천정에 달린 창문 너머로 밤하늘을 보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캐나다채널 TV도 그만큼 많이 봤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근로일지 또한 자유로이 작성하게 해주었다.
물론 나는 속이는 일 없이 성실하게 근로일지를 기입했다. 근로일지는 내 페이와 직결됐다.
그리고 내가 떠나는 날, 나에게 퇴직금 비슷하게 적지 않은 돈을 여비로 보태주셨다.
땡스기빙데이때에도 한국인들을 초대하여 같이 식사를 했었다.
진짜 캐내디안의 진짜 땡스기빙데이를 경험했다. 너무나도 즐거운 추억이 아니었는가.
그리고 특별한 나날들이 아니었던가.
언제나 근무의 시작을 자기집 거실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작했다.
내가 수도꼭지를 고치는 날에는 나를 신기하게 보며 잘했다고 했지.
그리고 나를 '쿵푸보이'라고 불렀다.
한국과 중국의 차이점을 몰라 나에게 중국인 전화를 바꿔준 적도 있었다..
그 때가 그립다.
그가 그립다.
처칠에서 일을 마치면 인근에 있는 바다로 가서 노을을 보며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그리고 날아가는 새들을 보며, 그리고 하늘을 보며 여기 하늘은 참 낮아보이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북극여우를 볼 수 있을까, 북극 올빼미는? 무슨 새는? 북극곰은? 하며 호기심 충만한 나날을 보냈다.
몇해 전 구글지도에서 보니, 지금의 처칠모텔은 이미 내가 알던 그곳이 아니었다.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했는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리고 처칠모텔에 붙어있던 문닫힌 레스토랑도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름도 처칠호텔이라고 하는 것 같고, 아마도 펜데믹으로 인해 운영은... 하지 않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리고 나를 고용해준 우리 대빵아저씨 덕 로빈슨도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뉴질랜드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이러면 어떻게 성묘를 가요...
세상은 변하고 있고, 과거의 경험은 이제 고스란히 추억으로만 남는 것 같아 섭섭하기 그지없다.
약 세 달간의 체류를 끝내고 나는 처칠을 떠났다.
사실 처칠을 좀 일찍 떠나는 이유로 우리 대빵아저씨의 괴팍한 성격도 한몫하긴 했다.
참으로...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어려운 존재였다.
떠나는 날.
눈보라가 몰아쳤고, 기차의 바퀴부분에는 고드름이 살벌하게 서려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설국의 밤열차는 출발했다.
출발하기 전 덕 로빈슨과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그는 극구 사양했지만 ㅋㅋㅋㅋ 참으로 까다로운 노인네였다 ㅋㅋㅋㅋ.
캐나다워홀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캔모어 생활이었지만...
정이 더 많이 가는건 처칠의 그들이다. 보고 싶다 다들~
파리의 노틀담의 성당보다도 더욱 아름다웠던 몬트리올의 노틀담의 성당 내부.
Ch4. 귀국여행 시작. 캐나다 동부여행
2011년 11월 중순.
처칠에서 출발하여 캐나다 동부를 여행하는 귀국여행을 시작했다.
얼어붙은 육중한 몸으로 레일위를 달리던 철차는 곧 그나마(?) 덜 추운 위니펙에 도달했다.
몇시간이나 연착되어 새벽에 도착한 위니펙.
과연 여름날의 그 때보다 무지무지 추웠다. 하지만, 윈터펙이라는 별명답게 겨울 역시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위니펙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토론토 - 몬트리올 - 퀘벡 - 할리팩스 - 멍튼 - 오타와 - 몬트리올 - 토론토
...를 여행했다.
그 유명한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인 나이아가라 홀스 슈 Niagara Horse shoe 폭포를 봤다.
CN타워를 올라갔으며, 몬트리올의 오리지날 푸틴을 먹어봤다.
해산물이 저렴한 노바 스코샤의 할리팩스에서는 랍스타를 사다가 너구리랑 끓여 먹어봤다.
시타델의 대포 발포식도 관람했구.
지금은 도깨비로 유명하지만, 그것이 방영되기 훨씬 전 퀘벡에도 가봤다.
가성비가 극악이었던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서는 빨강머리 앤의 집에 가서 남의 방도 엿보고..
오타와의 아름다운 국회의사당 앞뜰에는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약속대로 다시 만난 마크씨.
퀘벡의 여기저기를 차로 데려다주었다.
특히 마크씨와 재회한게 가장 뜻깊은 일이었던 것 같다.
퀘벡에서 만나 마크씨의 차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무슨 섬에도 들어가서 한바퀴돌았고, 캐나다에서 가장 길 폭포도 구경했다.
근사한 교회도 갔었다.
마크씨는 차를 몰며 퀘벡 이곳저곳에 대한 설명을 해줬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주 고맙고 배력있던 에스코트였다.
감사합니다.
사실 동부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건 할리팩스였다.
밴쿠버에서 홈스테이를 하던 시절, 벽에 걸려있던 캐나다전도를 보며 캐나다 횡단과 지구일주를 계획했었다.
캐나다가 한 국가이다보니, 캐나다횡단이 그리 어려워보이지 않았고, 캐나다를 횡단하면 지구를 거의 반바퀴 도는 것인지라 지구일주도 가능해보였다.
이런 생각 하에 결국 나의 캐나다 최종목적지는 할리팩스였다.
캐나다 서단 태평양에서 동단의 대서양까지!!!
캐나다 횡단은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구일주를 하겠다던 나의 계획은 유럽여행중 파산하여 급하게 집으로 후퇴하는 반쪽짜리 성공에 그치게 된다.
어쨌든 기대를 많이 했던 할리팩스에서는 그저 평온한 여행을 했던 것 같다.
겨울이라 공사하는 곳도 많았고.
캐나다 동부의 대다수가 겨울이라 문을 닫은 상점 및 식당들이 많긴 했다.
그래도 몬트리올이나 오타와는 멋졌지. 물론 내 취향은 아니지만 토론토도.
토론토에서 처음으로 프렌치 바닐라를 먹어봤는데 크으.. 역시 스티디 셀러는 이유가 있는 것이었.읍.니.다.
팀홀튼 여름메뉴도 생각나며, 기껏 캐나다에서의 1년을 정리했건만 다시한번 캐나다에서의 생활이 머릿속에 복잡하게 섞여들어온다.
할리팩스에서 캐나다여행의 종지부를 찍은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토론토로 다시 돌아온 후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유럽으로 향했다.
원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다시한번 미지의 유럽대륙으로 발길을 돌렸다.
내가 토론토를 떠나려는 지금, 리스본에서는 나보다 하루먼저 도착한 고향친구가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2011년12월. 아직 새해를 맞이하기 전.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종료하며, 아직 모험심이 충만했던 나는 부푼 꿈을 품고 이베리아반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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