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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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anada.

35세까지의 인생정리

[인생정리8][뉴질랜드워홀2] 말미에나마 황금같았던 뉴질랜드 생활. 크롬웰 체리농장, 북섬여행, 통가리로 크로싱.

아스라이39 2021. 3. 5.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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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 블레넘. 동터오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

 

 

강단있게 블레넘으로 떠나긴 했지만, 그곳에서도 그리 녹록치는 못했다.

 

염두해두고 있던 백패커스에서는 자리가 없었다.

이 때 역시 1차 유럽여행때와 마찬가지로 예약따위는 하지 않으며 움직였기 때문에 대안 역시 그냥 다른 백패커스였을 뿐.

 

그래서 선택한 한인 백패커스였다.

당시 블레넘에는 한인백패커스가 양대 산맥처럼 크게 두개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백패커스가 좋아서가 아니라 같이 있던 멤버들이 좋아서였으리라.

백패커스 자체는 지저분하고 열악했으며, 지저분했다.

 

일은 백패커스에서 알선해주는 일을 했는데, 그 또한 좋지는 못했다.

하지만 먼저 말해두자면, 통가에서 온 어떤 아저씨는 돈을 천문학적으로 벌고 있었다.

모든 환경이 열악하긴 했지만, 내가 제정신이였다면 돈은 충분히 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블레넘 초창기 시절의 실패는 아직까지도 정신차리지 못하고 상황이 나아지길 바랐던 내 잘못이 컸다.

 

포도밭에서 일했다. 

겨울철 포도밭은 3가지 업무로 나뉜다.

프루너와 스트리퍼, 그리고 랩퍼.

푸루너가 포도나무 가지를 자르면,

스트리퍼가 잘려서 철줄에 걸려있는 나뭇가지를 벗겨내고,

랩퍼는 세네가닥 남은 가지를 철줄에 묶는다.

 

그리고 남은 세네가닥의 가지들은 많은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다음 해에 탐스러움 과실을 만들어낸다.

 

내가 한 것은 스트리퍼였다.

그리고 곧 그만뒀다. 힘들고 돈도 안돼서.

100%성과제의 일이었는데, 초보인 나에게는 그리 녹록치 못했다.

그리고 다시 백수생활 시작.

 

그에 비해 죄스러울 정도로 백패커스에서 재밌게 놀았다.

한국인만 10명 남짓이 있었는데, 뭐..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술도 많이 마셨고. 

어쩌면 즐기면서 살았다는 말은 핑계일뿐, 방탕하게 살았다. 돈도 많이 깨졌고.

 

 

한인백패커스를 블레넘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가고 싶던 키위벙크 하우스라는 현지 백패커스에 자리가 나서 그리로 갔다.

 

여기서도 열악하긴 했지만, 다국적 친구들이 모여서 좀 워홀같은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러고보니, 캐나다와 뉴질랜드 워홀을 하며 다른 인종들과 같이 부대끼며 살았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멤버역시 괜찮았고. 

뉴질랜드라는 특수한 환경에 와서 그런지, 영국인이나 프랑스인, 독일인 등 서구의 친구들도 동양인과 친밀하게 부대끼며 지냈다.

 

키위벙크 하우스는 뭐랄까.. 뭐라 정의하기 힘든 곳이었다.

충분히 불행했고, 일자리도 녹록치 않았다.

뒤늦게 와인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했는데 인도인 슈퍼바이저가 자꾸 닦달해서 짜증났다.

난 일을 좀 열심히 했는데, 그래서 같은 팀에 있던 현지애들이 날 편한 공장으로 보내주지도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나에게 직장을 지켜준거였는데, 결론적으로 나에게는 아주 민폐가 됐었다.

 

이곳에서 역시 포도밭에서도 일했었다.

완전 각성해서 돈을 많이 번 날도 있었고, 래핑을 하며 나름 편하게 일하기도 했었다.

흐음... 그래. 래핑을 오래할껄 그랬나.

하지면 여전히 안정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래핑은 손가락을 짤릴뻔 하여 일을 관뒀다.

그 때 진짜 ㅋㅋㅋㅋ 새끼손가락에서 피가 철철 나는데 나보다 한살 많은 슈퍼바이저랑 웃으면서 1시간을 달려 병원을 갔었지. 그 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분명 아프긴 한데 고통이 느껴지질 않았다. 뇌에서 고통을 걍 인지하지 않는 것처럼 요상한 상태로 병원에 가서 무료 의료혜택으로 치료했다.

....난 그래도 실로 꿰매줄 줄 알았는데 풀을 붙여주더라.

.... 그 때 뭐랬더라... 손가락이 50%이상 잘려야 뭐 어떻게 해준다고 했는데 내 손가락은 한 40%잘린 상태였다.

 

흐음... 키위벙크 하우스. 여기 창고에 가서 고양이랑 놀고 있으면 좋았는디...

 

키위벙크에서 분명 즐겁게 지내긴 했는데, 딱히 친한 친구를 만들지는 못했다.

내가 이 때 엄청 폐쇄적이라 그랬던 것 같다.

 

상황이 잘못될수록 내 성격도 파탄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파탄난 성격은 독이 되어 세상살아가는 법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뉴질랜드 이후로 회사에 취직했으면, 절대 그리 쉽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가정일뿐... 의미없는 되뇌임이다.

 

와인공장 쉬프트 문제로 빡치는 일이 있었다.

내가 원했던 빵공장에는 순번을 무시하고 나보다 늦게 온 사람들이 들어갔다. 

불만은 팽배해있었고, 당시 한인백패커스에서 만난 친구와 상담을 했다.

그 친구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인맥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인맥이었지.

그 애의 말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요약하자면, 굳이 거기 뭐하러 있냐고, 빨리 이쪽으로 오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10월 후반의 이제 막 성수기가 시작되려는 찰나, 나는 움직였다.

좀 더 남쪽으로. 뉴질랜드의 심장이라고 부르고 싶은 오타고 지방으로 움직였다.

 

남섬 1시방향인 블레넘에서 반시계방향으로 넬슨을 거쳐, 서부해안을 따라 내려갔다.

 

그래도 일을 어느정도 했기에, 크라이스트 처치에서처럼 무모하고 철없는 여행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뭔가 마음이 들떴던 기억이 난다.

 


 

 

 

이때 글을 재미있게 잘 썼었다. 패러디도 많이 했었구.

시간은 많고 할 일이 없다보니, 글쓰는게 큰 낙이었다.

 


 

Ch2. 남섬 서부해안을 타고 오타고까지 여행.

 

 

남섬의 남부로 향하며 이전에 머물렀던 넬슨에도 방문해봤다.

그 사이 많이 달라진 이 작은 도시의 모습에 약간 서운했고 서둘러 떠났다.

넬슨을 뒤로 하고 프란츠 요셉, 폭스 글래시어 등 빙하여행을 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밟는 빙하의 땅.

캐나다에서 빙하를 먼 발치에서 본 적은 있으나, 이렇게 발로 디뎌본건 처음이었다.

여행계획을 잘못짜서 헬기도 두번이나 탔다.

한번은 그냥 돌아보는 것이었고, 한번은 빙하에 착륙하여 돌아다니는거였다.

빙하탐사에 헬기가 대동된다는걸 왜 몰랐을까.

여튼 뭐 두번의 경험 모두 즐거웠으니 됐다. 돈도 생각보다 많이 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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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e라는 페이지를 이용하여 액티비티를 예약했었는데 이게 유효했던 것 같다.

나름 저렴한 금액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

 

빙하를 돌아다니다가 날씨가 궂어져서 함께 이동하던 관광객 한명이 쓰러졌다.

투어는 중단됐고, 곧 우리를 구출하러 온 헬기를 타고 산을 내려왔다.

 

처음으로 해본 히치하이킹.

폭스 글래시어로 갈 때에는 숙소와 거리가 멀어서 히치하이킹으로 갔었는데, 갈 때에는 대만인 커플이, 올 때에는 호주 퍼스출신의 유쾌한 아저씨에게 신세를 졌다.

무엇이든 처음이 힘든 것이다.

이후로도 히치하이킹을 하며 차를 얻어타는 일이 많았고, 

뉴질랜드의 수많은 문화중에서 히치하이킹이 드물지 않았던 문화가 꽤나 마음에 들었었다.

 

4일 남짓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크롬웰에 도착했다.

내 뉴질랜드 생활에서 가장 빛나고 황금같던 시기였다.

 

 


 

 

Ch3. 뉴질랜드에서의 황금기. 크롬웰.

 

 

사건도 할 말도 쓸 말도 엄청 많은 크롬웰 생활이었다.

고단할지언정 일다운 일을 할 수 있었고,

페어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으며,

해외생활을 하는 느낌도 났다.

 

크롬웰에는 잡에이전시가 하나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거기에서 연락이 오진 않았다.

대신, 차타고 10분정도 걸리는 '알렉산드라'라는 마을의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매우 정상적인 일터였다.

그곳은 블레넘 때와 마찬가지로 포도밭이었지만,

작업분위기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공평'했다.

 

일단, 기본급없이 성과급으로만 임금을 매기던 블레넘과는 달리, 크롬웰에서는 최저임금을 지켰다.

물론! 최저임금 이상의 성과를 낼 때에는 성과급으로 전환되었다. 이게 정상적인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근면성실한 한국인으로서 결국 농장에서 탑을 찍었다.

미국인 여자애와 칠레 여자애랑 항상 경쟁하며 일했고, 성과도 우리 셋이 꽤 괜찮았었지.

뉴질랜드에서 생활하며 유일하게 캐나다의 정상적인 그것을 겪었던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서 쉴 때에는 당시 거주했던 캐빈 앞에서 의자를 펼치고 낮잠도 즐겼다.

이동식 의자도 편안한걸로 하나 사서 캐빈 앞에 설치하여 친구들과 수다도 떨었다.

 

여기가 어느정도롤 친자연적이었냐면, 친구랑 같이 밤에 캐빈앞에 의자를 펼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고슴도치가 지그재그를 그리며 나에게 오더니 콩! 하고 코를 박더라.

난 슬리퍼를 장갑삼아 조심스럽게 터치했고, 고슴도치는 몸을 동그랗게 말더니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이 얼마나 물아일체의 삶이란 말인가!!

 

혼자서도 많이 돌아다녔다.

퀸스타운에도 갔다왔고,

히치하이킹으로 더니든, 인버카길, 블러프, 그리고 다시 퀸스타운 등 여행을 하기도 했다.

더니든에서는 스파이츠 맥주공장과 초콜렛 공장에 가서 무지 좋았던 경험도 했다.

역시 브루어리에서 갓 나온 맥주가 지구 최강이여.

 

일터에서는 한달 일찍 다들 모여 크리스마스 파티도 했다.

연말에는 원하는 와인 두병씩 가져갈 수 있어서 레드와인과 무지 달달한 와인 두개를 집어왔다.

물론 둘 다 같이 지내던 친구들과 먹었고 ㅎㅎㅎ.

포도밭에서의 마스코트 빠스터. 저 귀여운 강아지는 보기와는 달리 성깔이 있어서 만지려고 하면 물었다.

퇴근길에 호수를 보면 오리가족을 볼 수 있었는데, 새끼들이 어미를 일렬로 졸졸졸 따라다니는게 너무 귀여웠다.

 

이때도 엄청 행복한 삶이었는데, 이 다음에는 더 행복한 한달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2014년이 끝나는 중이었고, 난 한국나이로 30이 되어가고 있었다.

포도밭에서는 연말휴일에 돌입했다.

나에게 내년에도 같이 일할거냐고 물어보더라.

미안하지만 거절했다. 내가 여기 온 궁극적인 목적은 체리농장이었다.

 


 

 

크롬웰에 도착한 그 단 하룻밤을 일본인 친구 타카랑 지냈다.

내가 뭔가 반가운 마음에 맥주를 한짝 사서 같이 나눠마셨다.

타카는 나에게 초록빛과 금빛이 도는 개구리 키링을 선물해줬다.

재회의 상징이라며 나에게 주었지만, 음... 살면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꽤 괜찮은 친구였는데...

 


 

Ch4. 황금기의 절정. 크롬웰의 체리농장.

 

 

이루 말할 수 없이 과분하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체리농장으로 옮기며 숙소를 체리농장에서 제공하는 숙소로 옮겼다.

무료는 아니었고, 적은 금액으로 지낼 수 있었다.

시설은.. 이걸 좋다고 해야할지 안좋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캐러번파크의 큰 캐러번 하나를 약 8명이서 같이 썼는데,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잠자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일상생활이었다. 너무나도 편안한 생활의 연속이라 그리 기쁠 수가 없었다.

 

하루의 일과는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체리를 열심히 따며 먹는다.

참고로 진짜 크고 굵은 밤톨만한 체리는 일하는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간다.

난 체리농장에서 일한 이후로 체리를 사먹지 못했다. 돈아까워서.

점심은 찬밥과 뉴질랜드 참치캔이었다.

여기서 더 업그레이드하면 마요네즈도 뿌려먹었지.

오직 한국인만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같이 먹으며 놀았다.

다른 국적의 워커들은 하나 혹은 커플로 밥을 먹더라. 우린 확실히 좀 특별했다.

약 5시쯤 일과가 끝나면 마트에 들러 맥주와 고기를 사고 숙소로 돌아온다.

맥주를 냉동실에 넣고 샤워하러 간다.

샤워가 끝난 후 병맥을 한잔하고 한숨 잔다. 이 때 맥주를 마시지 않으면 맥주는 냉동실에서 얼어 터진다.

기상후 야외에서 즐기는 바베큐 파티. 

또 먹고 마시며 왁자지껄 떠든다.

밤에는 서로 대화를 하거나 각자 다운받아놓은 드라마를 본다. 가끔 모여서 영화도 본다. 

잔다.

이 생활이 너무나도 즐거워서 황송했다.

 

갑작스럽게 여행을 하는 일도 많았다.

와나카, 퀸스타운, 좀 멀리는 더니든, 인버카길, 블러프까지.

블러프에서는 내 손바닥보다 큰 전복들을 채집하여 회로 먹고 볶아먹고 그랬다. 물론. 채집 허용지역이었다.

블러프의 무인 캠핑장에서 양심적으로 인원수만큼 돈을 내고 잠도 잤고...

블러프 가는 길은 어찌나 멋지던지.

 

혼자 다녀온 밀포드 사운드는 너무나 멋져서, 이전에 노르웨이의 피오르드에서 날씨가 흐렸던 것이 아쉬워졌었다.

그곳에서 또한 즐거운 인연을 만나 행복했다.

너무나도 멋진 크롬웰 생활이었다.

진작부터 뉴질랜드 워홀을 이런 생활로 시작했다면, 이리도 뉴질랜드를 저주하지 않았을텐데..

 

체리 시즌이 끝나고 각자 자신들의 계획에 맞춰 차등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떠나기 전에 친구들과 퀸스타운에 가서 루지를 탔다. 이 또한 잊기 힘든 기억이리라.

나는 마지막으로 떠나는 무리에 섞여 나갔다.

한달 남짓한 시간을 보낸 10인용 캐러번.

모두 떠난 그 쓸쓸한 자리를 보자니 서운한 감정이 들었지만, 다음해에 또 여기는 우리같은 워홀러들로 왁자지껄해지겠지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정말.

너무나도 고맙다 크롬웰.

퇴사까지 하며 생활한 뉴질랜드에서의 1년남짓한 시간을 헛탕으로 만들지 않아줘서 고마워.

아직도 나는 뉴질랜드가 뭣같다고 욕하며 살긴 하지만,

크롬웰 체리농장에서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그만큼 세상편하고 멋있게 살았던 때가 없었던 것 같고 느낀다.

 

하지만 너무 늦은 감사함이었다.

2월로 접어든 무렵이었다. 뉴질랜드에서 나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2달밖에 없었다.

일을... 못할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움직여보기로했다.

목표는 북섬. 거의 9개월만에 다시 방문하는 북섬이었다.

 

하지만 그냥 가기에는 섭섭하니, 이번에는 뉴질랜드 남섬의 동해안 여행을 하며 이동하기로 했다.

 


 

 

행복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감사하고 황송한 크롬웰에서의 시간이었다.

 


 

 

 

오아마루, 티마루, 아카로아, 크라이스트처치를 거쳐 비행기를 타고 웰링턴.

그리고 비로소 네이피어에 도착했다.

여행은 즐거웠고, 남섬을 벗어나며 남섬의 인연들 모두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Ch5. 네이피어 구직 실패. 그리고 북섬여행.

 

 

다시 원래 뉴질랜드 생활로 돌아왔다.

풀리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네이피어에 과수원이 많다 하여 여기저기 컨택을 하고 다녔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백패커스 호스트가 구직을 약속해주긴 했지만, 이미 1주일의 시간을 허비한 상태였다.

더이상 낭비가 있으면 안됐다. 네이피어를 떠났다.

 

그렇다고 네이피어에서 의미없이 시간을 보낸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좋은 친구들을 만난게 의미깊었다.

한국, 중국, 홍콩, 일본, 태국의 대 아시아 연합 ㅋㅋㅋㅋㅋ.

다들 괜찮은 친구들이었다.

 

이들을 보며 난 뉴질랜드에서 왜 더 열심히 살지 않았나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들은 일이 없더라도 어느정도 숙소일을 하고 잠자리를 제공받는 워크 익스체인지도 하고 있었다.

난 왜 그리도 오만방자하여 따지는게 많았을까.

너무 어렸다. 지금도 나아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특히 홍콩친구가 괜찮았는데, 그 친구랑은 차후 시드니, 홍콩에서도 만난다.

정말 매력적인 친구다.

 

루이스 초코우유를 마신 것도 의미있는 일이었다.

저 우유 더럽게 비싸다. 1리터 남짓 되는 병이 2만원 돈이었나?

내가 경험상 저 우유를 마시려고 마트에서 사서 나오니까, 외국인 애들이 나한테 놀라며 묻더라.

그걸 샀냐고.

그래요. 내가 바로 글로벌 호구입니다.

뉴질랜드에서 더 떨어질 나락도 없어요. 하하하하하.

 

음... 그래. 피조아도 생각난다.

뉴질랜드에서만 먹을 수 있는 피조아라는 열매.

이건 뉴질랜드생활 초창기 때 먹어봤는데, 워홀이 끝날 때까지 다시 못먹어볼 줄은 몰랐다.

시즌이 있는 과일이었다.

초코우유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생각나네(?).

 

 

더 이상의 기다림은 실패밖에 남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네이피어를 떠나,

 

타우포호수 - 통가리로 크로싱 - 로토루아 - 망가누이 - 케리케리 - 파이히아 - 오클랜드 - 해밀턴

 

...순으로 여행을 했다.

뭐 느낀 점이 있다면...

 

역시 뉴질랜드는 남섬이야!!!!

 

...였다.

 

북섬 역시 아름답고 매력적이긴 했다.

특히 통가리로 크로싱이 그랬고, 망가누이, 로토루아...

물론 남섬의 그것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훌륭한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뉴질랜드 최북단인 케이프 레잉가의 등대에도 가봤다.

그리고 실제로는 90마일이 아니지만, 90마일 비치라곡 불리우는 해변에서 샌드보드도 탔다.

루지에 이어서 훌륭한 액티비티였다.

모래사장에 올라가는게 지옥같긴 하지만, 내려올 때의 쾌감이란!! 크으!!!!!

거꾸로 타면 빙상스포츠 스켈레톤이 됨 ㅎㅎㅎㅎ.

 

오클랜드에서 관광상품으로 남겨진 트램도 타보고,

 

마지막은 해밀턴으로 장식했다.

 

오클랜드에서 굳이 다시 해밀턴에 가서 오클랜드 공항으로 출국하는 번거로운 일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뉴질랜드에 오기 전에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던 해밀턴을 좀 의미있는 장소로 남기고 싶었다.

...

결론적으로 해밀턴이 뉴질랜드 워홀에서 굳이 특별해지진 않았다.

 

 


 

 

이미 남섬에서 환상적인 몇달을 보낸 나에게

해밀턴의 보타닉 가든은 딱히 감동적이지 못했다.

 


 

Ch6. 통가리로 크로싱.

 

 

굳이 통가리로 크로싱을 따로 다뤄보고 싶었다.

이제는 일정 자체가 기억이 안나지만, 당시에는 타임레코드를 작성하며 트래킹 코스를 주파했다.

 

주파. 그래 주파했다는 말이 옳다.

통가리로 크로싱은 정해진 시간제한이 있어서 중간에 갈라지는 코스 두개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나는 뉴질랜드에서 세번째 초인모드로 돌입한다.

블레넘 포도밭에서 한번,

크롬웰 포도밭에서 한번.

그리고 지금.

 

걷고 달리고 해서 두가지 코스 모두를 패스했고, 나는 뿌듯했다.

....

한동안 무릎을 칼로 써는 듯한 느낌을 견디며 걸어다녀야 했지만... 이건 뭐... 그럼직 했지.

 

통가리로 크로싱의 백미는 화산에 올라가는 것이다.

활화산까진 아니고, 휴화산인 것 같은데, 주위에 유황호수와 유황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걸 보니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화산이었다.

그 와중에 흙바닥인 분화구에 텐트를 치고 야영준비를 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 나도 해보고 싶긴 하지만, 시간도 없고 장비도 없었다.

 

화산은 올라갈때 모래 언덕을 기어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미친듯이 힘들다는 소리다.

거의 1시간 반을 발이 푹푹빠지는 모래 오르막길을 기어서 올라갔는데, 중간중간에 돌 떨어지는거 조심하라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결국 정상에 도달. 하늘섬과도 같은 느낌의 마천루에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고,

내려갈 때는, 세상에 15분도 안걸리더라.

마치 슬라이딩을 하듯 모래를 푹푹 밟으며 빠르게 내려갈 수 있었다.

그제야 산 중턱을 기어오르고 있는 다른 관광객들을 배웅하며...

 

멋진 곳이다.

남섬의 아름다움을 견제할 북섬의 한가지 비수라고 해야하나?

다시 가더라도 멋질 것 같다.

 


 

그 저주스러운 뉴질랜드 워홀이 끝났다.

나에게 남은 것은 500만원의 손실과 마음의 상처였다.

 

처음에 이민 어쩌고 하는 생각도 말끔히 지워졌고, 내 머릿속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관심과 집중으로 가득 차있었다.

 

일단 돈이 없으니 돈을 벌어야겠지... 내 통장잔고는 0에 수렴하고 있었다.

 

밑천을 마련하고 호주를 가자.

그러한 다짐을 품은채 귀국했다.

...

귀국하기 전에 싱가포르에서 짧디 짧은 여행을 하고 왔다.

그냥 한국으로 바로 귀국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망할 이래서 기억은 위험한거다.

미화된다.

난 뉴질랜드에서 머물며 그렇게 뉴질랜드를 저주하고 캐나다보다 못한 곳이라고 못박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회상하니 너무 그립고 멋져보인다.

...

진짜 빨리 펜데믹이 풀려서 밴쿠버, 알버타 등의 캐나다의 수려한 자연을 내눈으로 봐야겠다.

그래야 뉴질랜드에 대한 미화도 감화되어 심적 안정을 찾을 듯.

 

... 통가리로 크로싱 또 가고 싶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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