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여의 공장일을 끝내니 통장에 돈이 200만원 정도 있었다.
항공편은 뉴질랜드 워홀 때 이용했던, 가격과 질에서 큰 만족을 느꼈던 중국남방항공을 타고 호주로 향했다.
이번에는 철저한 사전조사를 통해 광저우에서 8시간 이상의 경유시간을 만들고, 무료 호텔서비스를 이용했었다.
중국남방항공. 만족스러웠다.
내가 랜딩한 호주는 브리즈번이었다.
처음 브리즈번에 도달했을 때에는 별 감흥도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며 새로운 시작에 대한 생각만 하였다.
그러나 여행도 해야 해서 론파인 생츄어리라는 곳에 가서 코알라, 캥거루를 비롯한 많은 야생동물들을 근접관찰할 수 있었는데, 뭐 그저 여흥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더 굉장한걸 많이 본다.
시작은 캐나다나 뉴질랜드와 마찬가지였다.
일단 전화를 개통하고 통장을 계설하며 노동번호 TFN(Tax File Number)을 받는다!
뉴질랜드와 마찬가지로 브리즈번 공항에서도 호주통신사 심카드를 판매하고 있었다.
뉴질랜드에서는 텔레콤(후에 스파크로 이름이 바뀐다)을 썼었고, 호주에서는 옵터스를 썼었다.
캬아... 옵터스... 추억의 이름이다.
은행은 ASB를 썼는데, 매우 만족스러웠다.
앱같은 시스템도 편리하게 잘 되어있고,
차후 한국에 들어와서 계좌를 해지하기도 '매우' 쉽다.
호주의 노동번호 TFN은 발급받는데 2주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단은 브리즈번에서 임시번호를 받고, 다음 기착지인 탬워스에서 제대로 된 TFN을 우편으로 받았...던 것 같다.
여튼. 준비는 완료.
브리즈번에서의 짧은 여흥을 끝내고 탬워스로 떠났다.
....이게 실수였는지 필연이었는지 아직까지도 알 수 없던 곳.
증오는 하지만, 그 중 사람들은 잘 만났던 그곳.
나의 첫 기착지이자 첫 실패지였다.
Ch1. 썪을대로 썪어 문드러진 탬워스.
'좋은 형 누나들 만나서 괜찮았어요 ㅎㅎ.'
싫어하긴 힘든 말이지만, 패배를 정당화하는 비겁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나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굳이 호주가 아니라도 다른 곳에서 훌륭하고 진취적인 청년들을 많이 만나봤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상황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사람' 그것도 '한국인 형 누나 언니 오빠 동생'을 잘 만났어요... 라는 것은 이역만리 외국까지 온 목적을 빛바래게 만드는 것이다.
탬워스로 간 이유는 명확했다.
안정적인 세컨비자.
격외지에서 일정기간 이상을 농업이나 공업에 종사해야 호주에서 두번째 해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난 탬워스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인줄 알았다. 왜냐면 당장 나만 해도 '탬워스'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다.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이 도시에 대해 알게 되었고,
양공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걱정과 설렘을 안고 이동했다.
....하지만 현지사정은 그리밝지 못했다.
나는 한달가량동안 대기를 탔다.
그 이유는 좀... 어이없는 이유이다.
탬워스에는 한국계 부부가 플랜테이션급으로 숙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몇개의 집을 돌리며 뭣모르는 워홀러들을 받아 자기네 집에서 묵게 한다. 일자리를 제공해준다는 조건 하에.
이들은 공장의 컨트랙터와 모종의 계약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일자리를 독과점해버린다.
그리고 워홀러들이 4달의 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일종의 보증금인 '디파짓'을 낼름 먹어버린다.
이 외에도 숙소 분위기라던가 일자리 등 많은 부정적인 사안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나는 운이 조하서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고, 꽤 분위기가 좋은 워홀러 또래들이 뭉쳐사는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탬워스를 선택한 나에게 불행 중 천만!!!!!!!!다행이었다. 신이 도왔다 진짜.
그 숙소와 양공장 사이에는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
양공장의 아웃소싱 업체를 어떤 동양인이 운영하는데, 이 플랜테이션 숙소에서 묵고 있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고용되었다.
난 한없이 기다리다가 결국 목표로 했던 양공장은 계획에서 폐기. '바이아다'라는 닭공장에서 일하게 되었고,
닭공장 역시 동아시아계 컨트랙터가 인력을 도맡고 있던지라,
비싼 장비구입에, 기본급없는 무조건적인 성과제 등의 이유로 내 삶은 피폐해졌다.
뉴질랜드의 블레넘으로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래도... 닭공장에서 일했던건 어떤식으로 도움이 되긴 했다.
통장이 역시 바닥을 치고 있던 시점에서 난 무슨 일이든 마다않고 해야 했다.
하지만 글쎄...
착취받으며 일할 내가 아니었다.
결국 나는 짐을 싸서 다른 도시로 향했다.
멜버른.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선택이었다.
멜버른에서는 일자리를 구한다고 해도 세컨비자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멜번 외곽으로 나갈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자포자기한걸까.
모르겠다 나도.
Ch2. 비상하기 시작하는건가. 그리피스로 이동.
멜번에서는 1주일만 있었다.
결론적으로 디파짓을 못받고 나오게 됐는데, 뭐 그럴만한 가치는 있었다.
그리고 그 못받은 디파짓.. 전혀 다른 상황을 통해 다른 쪽에서 꽁돈을 얻게 된다.
진짜 인생은 새옹지마.
멜번에서도 역시 상황은 좋지 않았다.
날씨는 주구장창 흐렸고, 구직은 되지 않았고, 돈은 계속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탬워스 닭공장에서 알게 된 우리 오장, 홍콩인 휴고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리피스'라는 곳에서 사람을 뽑는데 갈꺼냐구.
그리피스는 내가 매우 관심있게 보던 도시였다.
위성지도로 보면, 그 도시의 생김새가 기하학적으로 생겼고,
이름도 만화 베르세르크의 빌런과 같았다. 그 두가지 이유만으로도 꼭 방문하고 싶던 곳이었다.
게다가 근무조건도 좋았다.
대만의 초짜 컨트랙터들이 현지상황을 모르고 무작정 좋은 조건으로 사람들을 고용한 것이다.
차후 그들은 곧... 도망친다. ditch us 해버린다.
일단 그건 나중일이고..
기차를 타고 낭만적으로 그리피스에 도착했다.
숙소는 오렌지농장을 경영하는 아일랜드인 부부의 백패커스를 이용했다.
이미 오렌지농장은 비수기에 있어서 온 건물을 내 집처럼 썼다. 이건 매우 좋았음.
하지만, 닭공장까지는 걸어서 편도 2시간 거리였다.
이 출근을 몇일 몇날동안 해낸 내 자신이 존경스럽다.
그리 나쁘지만도 않았다.
아침 7시에 출근하기 위해 5시에 길을 나서자면 주위는 온통 깜깜하고 별은 반짝반짝 거리는게 마치 우주를 걷는 듯한 느낌이 났다.
그 기분은 매우 오묘해서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차후에는 동료들이 생겼고, 그들이 날 차로 퇴근시켜주곤 했다.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대만인 3명과 한국인 1명, 그리고 나까지 5명으로 구성된 파티였는데,
서로 영어를 쓰는 분위기였고, 다들 외향적이었으며, 참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다 같은 숙소를 쓰고 있었다. 나만 다른 곳에서 살고 있었다.
이게 매우 서운하게 생각되었는데, 그들을 향한 내 마음은 꽤 각별했다.
한번은 그들의 숙소에 놀러가서 대만 음식을 먹으며 놀았다.
더욱 같이 살고 싶어졌었다.
일터에서도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한국인은 나를 포함하여 단 두명이었다.
그러다보니, 영어를 사용해야 하는 분위기라서 좀 좋았던 것 같다. 어쨌든 나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일터의 한 친구는.... 아 이름이 생각이 안나네. 대만친구였던걸로 기억하는데, 나한테 닭 빨리 썰기 시합도 걸고 그랬다. 내가 졌다. 아니 근데 내가 너보다 느리긴 한데, 덧붙여서 이기고 싶은 동기가 없었어...
안타깝게도 이들과의 유대는 1달만에 끝난다.
일하는 공장에서 임금이 체불되는 사건이 있었다.
사실, 우리는 아웃소싱 업체에서 일하는거니까 아웃소싱 업체가 잘못한건데, 우리는 바이아다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곳 직원도 처음에는 우리에게 아웃소싱 업체로 가라고 하다가, 우리가 4주동안 임금을 못받았다고 하니까 놀라며 적극적으로 맞아주더라.
그리고 이 방법이 직방이었다.
대만 컨트랙터가 도망간 후 우리를 맡은 캄보디아인 컨트랙터가 바로 현금으로 우리에게 임금을 쏴주었다.
그 싱숭생숭 어수선한 찰나에, 이번에도 탬워스에서 같이 지내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한국인이었다.
지금 자기는 다윈에 있는데, 일 엄청 편하다고, 돈도 많이 준다고 오라고 하더라.
닭공장분위기도 안좋겠다, 떠나는게 낫겠지 싶었다.
2015년 8월 23일 즈음해서 나는 그리피스를 떠나는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난 다윈에서 이 결정을 매우 후회했고,
이 이후로 한국인이 설령 나에게 호의를 베풀더라도 경계하게 되었다.
도움을 주려는 마음은 감사하게 받겠지만, 그들의 도움은 나에게 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 꼭 이 경우가 아니라도 말이지.
다윈에 가기 전, 뉴질랜드 네이피어에서 만난 친구, 홍콩인 샘을 만났다.
그 친구는 귀국여행 중에 시드니에 잠시 들른 것이었다.
실망스러웠던 시드니에서의 여정에서 큰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Ch3. 격동의 다윈.
어떻게 다윈은 제대로 된 사진한장이 없다...
다윈에 도착하기 앞서서 시드니 여행을 먼저 하기로 했다.
뉴질랜드에서 만난 친구 샘이 귀국하기 위해 시드니에 들른다는데, 타이밍이 맞아 같이 여행하기 위해서였다.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던 시드니에서의 여정에서, 그 친구와의 만남은 아주 다행스러운 즐거움이었다.
다윈.
그래. 다윈에 도착했다.
그리고 망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장점도 있었다.
처음 겪어보는 호주 트로피칼 지방의 독특한 식생들.
흔히 볼 수 있는 애보리진.
덥디 더운 기후. 아니, 계절상 겨울에 속하는 8~9월인데도 이렇게 더울 수가 있나 싶었지만, 위도가 거의 적도에 다다랐으니 그럴 만도 하지.
쉬울거라는 근무는 노가다 그 자체였다.
박스공장이었는데, 쉴 새없이 움직여야 했고, 기계 잔고장이 많아 계속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일종의 일하는 퍼포먼스도 취해야 했는데, 같이 일하는 애 중, 일머리 있는 애가 있어서 노련하게 일처리를 하니까, 슈퍼바이저가 열심히 액션을 취하라는 듯한 요구를 하더라.
아, 참고로 이들 모두 한국인이었다.
한국인 컨트랙터에 한국인 일꾼들.
한가지 다행인 점은 이 경험이 나의 가치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뉴질랜드, 탬워스..... 똑같은 클리셰에 너무 지쳤던걸까? 난 이 이후로 한국인 있는 곳으로는 찾아가지 않는다.
....
근데 1년 후에 캐나다에서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 것 같아 걱정이긴 하다.
이건 미래의 이야기구.
근무를 마치면 코속에서 시꺼먼 코딱지가 나왔다.
인종차별을 하는 호주 슈퍼바이저는 그동안 말도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길들여져 온갖 성질을 다 내며 우리를 혐오했다.
그래. 돈은 많이 벌었다.
돈만큼은 버티는대로 많이 벌 수 있는 장소였다.
하지만 난 그런거 필요없었고, 나에게 미안해하는 친구를 뒤로 하고 다윈을 떠났다.
이렇게 많은 불만을 토로하며 이야기하지만, 난 여기서 일할 때 후회없이 일했다.
한국인의 습성에 따라 근면과 성실의 끝을 보여줬고, 내가 그만큼 열심히 했기에 죄책감없이 등지고 떠날 수 있었다.
한국인 슈퍼바이저도 나를 미소지으며 보내주더라.
떠나기 마지막날, 난 이미 다음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시티에 나와있었는데, 인력에 구멍이 났다고 슈퍼바이저가 나에게 헬프쳤다.
난 수락했고, 진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엄청 열심히 일했다.
좋지 않은 상황과 가혹한 일, 여기서 내가 떳떳해지려면 그만큼 일을 열심히 잘 해야 한다.
Ch4. 기회의 땅, 든든한 반석이 되어준 애들레이드.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호주 동부와 남부, 중앙과 북부. 그리고 다시 남부로 간다.
다음 선택지는 애들레이드였다.
다윈을 떠나기 전, 다음 기착지의 후보로 퍼스와 애들레이드, 타즈매니아를 꼽았다.
그리고 셋 중 어디가 낫냐고 주위 한국인에게 물어봤다.
퍼스와 타즈매니아는 어느정도 추천해주던데 애들레이드는 한명도 추천해주지 않더라.
애들레이드로 갔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구직을 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건실한 직장을 구하고 돈도 많이 벌었으며, 다국적 친구들과 같은 집에서 룸쉐어를 하고 살았다.
일터에 한국인도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한국인을 피해 만난 한국인은 꽤 괜찮고 근사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
그들은 호주 이민 1세대로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샐러드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일본인도 한국인도 필리핀인 베트남인도 많았다.
특히 미얀마 출신의 쪼밍이랑 친했다.
성격도 좋은 분이었는데, 도시락으로 싸오는 '삼발'이라는 매운소스를 육개장 사발면에 넣어먹으면 맛이 기가 막혔다.
아 다들 그립다.
크리스마스 여름성수기 시즌과 맞물리며 혹독하게 일하긴 했지만,
그렇게 페어하게 일하고 돈을 많이 벌었던 적은 드문 것 같다.
남들은 가난한 도시다, 일자리 없다 그러며 떠들고 다닌다.
이건 호주애들도 똑같이 떠들고 다닌다.
하지만 애들레이드는 나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준 너무나도 고마운 존재였다.
런들몰, 차이나타운, 센트럴 마켓, 슈바 형이랑 같이 가던 쌀국수집, 글레넬.....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도, 40도가 넘어가던 그 건조한 무더위도, 출퇴근길에 내 머리를 때려대던 파리들마저도...
아 너무나도 그립다. 손에 잡힐 듯이 그립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 머리를 때리던 파리는 안그립다.
이제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내가 만약 호주로 이민을 가서 살게 된다면 1순위 거주지 후보는 단연 애들레이드다.
이 사랑스러운 도시를 떠날 즈음. 이미 2016년도 두달이 흘러버렸다.
워홀 1차전. 1년동안의 다사다난한 일정을 잠시 멈춰두고 잠시 한국에 다녀왔다.
애들레이드의 유일한 트램을 타고 끝까지 가면 도달하는 곳은 글레넬 해변이다.
이곳에서 본 선셋은 그라나다의 산 미구엘 전망대에서의 그것과 견줄만큼 가히 내 생에 최고의 선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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