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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까지의 인생정리

[인생정리7][뉴질랜드워홀1] 희망차게 시작했지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뉴질랜드 워홀 전반전.

아스라이39 2021. 3. 4.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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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로 워킹홀리데이로 간 이유는 3가지가 있었다,

 

1. 내 손에 워홀 비자가 들려있었다.

2. 퇴사.

3. 이민.

 

3번의 이유가 매우 중요한데, 이미 입사과정에서 나는 한국에서 일종의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더 올라갈 수도 올라갈 힘도 없었다. 

그리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따라서 나의 선택은 당연스레 한국밖으로, 이민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왜 공무원이나 창업 등 다른 옵션이 아니었는가?

 

내 인생의 경험에서 당시 선택할 수 있던 경험은 외국생활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뭐 굳이 이민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이거저거 하면서 살 것 같은데 그 때 그 당시로서는 이민이 최고의 대안이었다.

 

뉴질랜드로 이민가면 캐나다로 가기 쉬울 줄 알았다.

캐나다로 이민을 갈지 거주를 할지 지금 생각해보면 뚜렷하지도 않은 목적이었지만, 여튼 당시의 나로서는 뉴질랜드가 캐나다와 같은 커먼웰스 국가(영연방국)라서 일단 뉴질랜드로 먼저 이민가면 옵션이 많아질 줄 알았다.

당연히 말도 안되는 생각이었다.

 

여튼.

이러저러한 생각의 끈을 잡은 채 나는 오클랜드로 향했다.

시절은 4월.

항공사는 중국남방항공.

개인적으로 꽤 괜찮았던 비행이었는데, 후기를 보니 다들 불만을 많이 써놨더라.

 

 


 

Ch1. 별로였던 오클랜드.

 

 

 

 

오클랜드에서 찍은 수많은 사진들은.... 예전에 사진을 이동하다가 다 날라갔다 ^_^ 아유 아까워라.

진짜 페이스북과 네이버블로그가 아니었다면 좋은 추억들이 다 사라질 뻔 했다.

지금은 역으로 SNS에서 컴퓨터로 사진을 다운받으며 당시의 기억을 새록새록 피우고 있다.

 

워홀을 하면서 그 나라의 제1도시로 가서 좋았던 적이 없던 것 같다.

캐나다의 밴쿠버가 그랬고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그리고 호주에서도 시드니가 그랬다.

 

오클랜드는 뭐... 뭉뚱그려서 생각하면 그저 여느 나라의 대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1000만 시민의 서울에서 거주중이고 이런 '엉성하기 짝이 없는 대도시'는 내게 별 자극이 되지 않았다.

 

물론 볼만한 것들이 있긴 했다. '원 트리 힐'이나 '랑기토토 섬', 어딜 가든 보였던 오클랜드 스카이 타워, 그리고 맑고 푸른 하늘과 바다까지.

하지만 시덥잖았다.

맑고 푸른 하늘과 바다는 뉴질랜드에서는 흔한 풍경이었으므로 굳이 오클랜드에 목을 멜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근처의 미션비치라는데를 갔었는데, 거기서 먹은 칩스는 상당히 맛있었다.

 

칩스.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식을 따라 프렌치 프라이라고 부르는 감자튀김.

하지만 이곳에서는 영국식을 따라 칩스라고 한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칩스는 간식, 분식 이상의 존재감이 있었다.

 

주로 뉴질랜드에서 먹었던 외식이 '피쉬 앤 칩스'라고 생선튀김과 감자튀김이 함께 나오는 음식이었다.

섬나라의 싱싱한 생선과 뉴질랜드 감자 칩스.

맛을 글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뉴질랜드 칩스는 정말 맛있었다.

어느정도였냐면... 뉴질랜드 워홀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 맥도날드에서 프렌치 프라이를 먹었을 때.

그 때 감자에서 아무 맛도 안느껴졌다. 종이를 씹어먹는 느낌이랄까.

그정도로 뉴질랜드에서의 칩스는 풍미가 엄청났다.

 

여튼 난 오클랜드에 도달한지 열흘도 안되어서 빠르게 지역이동을 감행했다.

오클랜드에서 한 것은 초기정착의 3대 요소인 폰 개통, 통장개설, 노동번호 획득 이었다.

 

원래는 즐겨보던 블로거의 행적을 따라 해밀턴 근방의 작은 시골마을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변수는 언제나 생기는 법.

난 바로 남섬의 넬슨. 뉴질랜드의 정중앙으로 향했다.

 


 

 

넬슨으로 가는 길은 험했다. 

버스를 타고 웰링턴에 가서 페리를 타고 남섬으로 이동, 그 후 다시 버스를 탔다.

중간에 잠시 머무르며 돌아본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은 생각외로 근사한 도시였다.

나에게 다시 뉴질랜드 워홀을 가라면, 웰링턴에서는 꼭 거주해보고 싶다.

 


 

Ch2. 넬슨에서의 짧았던 거주. 한국인은 적인가 아군인가.

 

 

넬슨에서부터 한국인에 대한 적의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캐나다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대체로 모험심있고 능동적이었으며 자주적이었다.

아마도 캐나다 워홀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노력이 필요하기에 한번 필터에 걸러진 것 같은데, 

반면, 그냥 지원만 하면 거저되는 뉴질랜드와 호주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실망을 많이 했었다.

 

당시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넬슨의 한 스시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사장님도 좋고, 사모님도 좋았다. 두 분 모두 뉴질랜드에서 사기도 맞아가며 꿋꿋이 버티고 이룩한 결과 이 지방에서 알아주는 스시체인을 만들어냈다. 훌륭한 분들이시다.

 

일하는 것은 완전 한국스타일.

시간을 나노로 쪼개서 일을 하게끔 한다. 그래서 피곤한 면도 있었다.

이렇게 일만 하러 온 것이 아닌, 여유를 만끽하며 살고자 온건데....

하지만 내가 이곳을 떠난 이유는 비단 근무스타일이 아니었다.

 

자식.

사모님의 아들이 너무... 별로였다.

사업은 잘 키우신 것 같은데 아들은 잘 못키우신 것 같더라.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이미 성년의 나이였는데도 걍 지 끌리는대로 분위기를 더럽혔다.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지쳐나갔고, 결국 한달 일했나? 퇴사를 말씀드렸다.

사모님께서 그러시더라. 자기는 사람보는 눈이 있는데, 내가 그만둘 사람이 아니었다고.

네. 맞아요. 전 여기서 오래 일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차마 당신 자식때문에 그만둔다는 이야기는 못했다.

 

넬슨을 떠나기 직전, 스시집의 슈퍼바이저이자, 플랫(숙소)의 마스터인 일본계 이민자 '수'에게 내 마음을 털어놨다.

그 아들때문에 그만두는거라고. 

속이 후련하더라.

 

그 후로도 뉴질랜드, 호주 워홀을 하는동안 재외한국인이라는 존재는 항상 애증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리고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

 

 

어딜 가든 결국 한국인은 있다.

한국인이 있다는 것을 염두하고 가면 당신의 워홀은 망할 가능성이 높다.

그 한국인은 당신에게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피해를 끼칠 확률이 높다.

하지만 한국인이 있을 줄 모르고 갔다가 한국인을 맞닥뜨린다면,

그 한국인은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 사람은 충분히 도전정신이 강하고 당신은 그 사람에게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전자는 시티일 확률이 높고 후자는 오지일 확률이 높다.

 

 

이렇게 안좋은 말만 쓰고 있지만, 넬슨은 매우 아름답고 근사한 곳이었다.

뉴질랜드의 정중앙에 위치한다는 것도 그렇고, 마을이 유독 예뻤다.

시간이 되면 상가 처마에 달린 꽃화분에서는 자동으로 물이 나왔다.

시티 중심의 크라이스트 처치라는 교회는 계단 위에 위치하고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빼곡히 박혀서 똑딱이 카메라로 찍어도 사진이 잘 나왔다.

주위를 산책하자니 산과 들과 천과 마을이 너무나도 조화로웠다.

아시안 누들집에서 외식도 많이 했고,

집과 일터와 시티가 가까워 자주 놀러다녔었다.

 

근사한 곳이었는데....

음... 나중에 다시 방문했을 때 넬슨은 처음 느낌과는 달라서 실망을 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주 방문하던 한인마트는 중국인마트가 되어있었다.

다시 찾은 스시집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괜히... 다시 방문한건가 싶은 생각도 들긴했지만... 뭐 이제 다 지난 일이다.

 


 

 

뭐 그래도 어딜가든 잘 먹고는 지냈다.

양 도가니가 있길래 신기하다 싶어서 오븐으로 조리했는데, 덜익어서 결국 프라이팬으로 다시 조리했다.

뉴질랜드에섯 정말 많이 즐겨먹었던 TUI맥주. 사실 노란색 라거를 많이 먹었지.

나중에는 스파이츠라는 맥주를 즐겨먹었던 기억이 난다.

 


 

Ch3. 실패와 방황. 모투에카와 크라이스트 처치.

 

 

넬슨에서 나온 이후로 나의 워홀역사 최대의 암흑기에 돌입하게 된다.

넬슨에서는 5월 말까지 일했는데, 이게 실수였다.

뉴질랜드의 5월 말은 초겨울의 비수기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사실 이런 실수를 할 수 밖에 없던게, 캐나다에서 일한 시간이 4월부터 11월까지였다. 

북반구 여름철의 성수기를 맞아 일 못할 걱정이 없었다.

비수기를 겪어보지 못했었고, 비수기의 무서움도 몰랐었다.

 

게다가 나는 시티잡은 안할거라는 헛된 고집을 갖고 있었다. 나의 목표는 오로지 공장이었고 이 어이없는 오기는 날 뉴질랜드 워홀 실패의 길로 인도했다.

 

정보는 있었다.

6월부터 넬슨 근교도시 모투에카에서 공장직원을 뽑아요~

뉴질랜드 한인 까페에 올라온 글이었다.

역시 한국인은... 할많하않.

그 사람도 일부러 거짓정보를 흘린건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한국인의 호의가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일은 자주 발생하게 된다.

 

여튼 모투에카에서 보름정도를 머물렀다.

공장에서는 더이상 직원을 뽑지 않았고, 구직은 실패했다.

한가지 추억이 있다면, 말레이시아 친구들을 만나 동물농장에 놀러갔던 일이다.

너무 짧은 만남이라 이 다음으로 연락은 하지 않는다.

가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에서 좋아요를 서로 눌러줄 뿐...

 

나는 곧 워홀이 끝나는 동행을 만나 같이 크라이스트처치로 향했다.

그 동행이 전에 일했던 크라이스트처치의 공장 정보를 알려준 것이다. 어짜피 모투에카에서는 10월까지 구인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난 이동하기로 했다.

 

이 결정은 올은 결정이었다.

다만 난 아직도 멍청이였다.

 

크라이스트 처치에서는 6월 중순부터 7월 말까지 있었다.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역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방세와 식비는 계속 나가고 있었고, 취직은 안됐다.

시내의 몇몇 인력센터에 이력서를 제출하긴 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아, 캠핑카 세차일을 이틀 했구나.

인력센터에서 온 전화를 못받은 적도 있었구.

 

왜 그렇게 공장에 매달렸을까?

크라이스트 처치에는 수많은 호텔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하우스키핑 경력이 있다.

이를 잘 활용했으면 유익한 겨울철을 보냈을 것을...

 

결국 나는 도시생활을 접고 블레넘에 가기로 했다.

워홀러들의 성지.

하지만 워홀러들의 무덤이기도 한 블레넘.

 

지금 생각해도 나름 괜찮은 선택이라 생각은 하지만, 그 때의 나는 너무나도 애송이였다.

 

아, 추가로 덧붙이자면.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리스타트 몰의 푸드트럭에서 파는 수블라키였다.

그리스음식인데, 그리스 여행갔다온 애가 본토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었댄다.

나 역시 그리스에 가본 적은 없지만 같은 생각이었다.

 


 

지진이 발생한지 2년여가 흘렀지만,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은 아직 복구중이었다.

여기 뿐만 아니라 길 곳곳에서 아직 지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10여년이 흐른 지금은 모두 복구되어있겠지.


 

Ch4. 망중한, 아니, 한중망의 크라이스트 처치 근교 여행.

 

 

아무리 망해가는 워홀이라지만, 여행은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아직 잔고가 많이 남아 있었다.

 

덧붙이자면, 뉴질랜드 워홀을 실패한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돈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200만원 가져가서 쪼들렸던 캐나다 워홀이 너무 가혹해서 뉴질랜드에서는 500만원을 가져갔었다.

그리고 그거 믿고 게으름 피우다가 다 날렸다.

 

어쨌든.

크라이스트처치에 있으면서 카이코우라, 테카포 호수, 마운트 쿡 등 백수신분에 걸맞지 않게 눈이 호강하는 호사를 누리며 오지게 돌아다녔다.

 

 

 - 카이코우라

 

 

카이코우라는 남섬 1시방향의 해안마을로 무지막지하게 아름답더라.

물개들을 근접하여 관찰할 수 있는 seal colony도 좋았고,

싸게 즐길 수 있는 노점상의 크레이피쉬도.... 음... 경험상 먹어봐서 좋았다고 치자.

 

제일 좋았던건 돌고래들과 오픈워터에서 같이 수영할 수 있는 '돌핀 스윔' 관광상품이었다.

이거 진짜 엄청났던게, 돌고래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다가와서 장난친다. 진짜 별천지임. 

돌핀스윔은 호주 스카이다이빙과 더불어 내가 지금껏 제일 잘한 액티비티인 것 같다.

 

그밖에도 카이코우라는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방문하고 몇년 후... 지진이 크게 발생하여 자연과 도로가 많이 훼손됐다던데...

물개서식지가 무사한지 모르겠다.

 

 

-브리들 패스와 리틀턴

 

 

리틀턴은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5시방향으로 조금 가면 있는 해안가의 작은 서버브다.

뉴질랜드 개척시기에 개척자들이 리틀턴과 크라이스트 처치를 오갔는데, 

내가 방문한 오솔길이 그 개척자들이 오고 갔던 브리들 패스다.

지금은 산 정상에 곤돌라 스테이션이 있어 쉽게 올라갈 수 있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여길 오가는게 매우 힘들었을 것 같다.

왜냐면 나도 걸어보니까 무지 힘들었으므로...

 

이곳에 오르면 크라이스트처치의 전경과 어우러지는 파란 바다의 절경을 볼 수 있다. 

꼭 가보길 추천합니다.

 

리틀턴은 작은 마을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공사하는 곳이 많았다. 

그외 딱히 별 감흥은 없었다.

 

 

- 테카포 호수와 마운트 쿡

 

 

테카포 호수는 남섬 중부에 있는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다.

남섬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몇개 있는데, 대표적으로 푸카키 호수와 와나카 호수도 있다.

비단 크고 유명한 호수가 아니더라도 그냥 동네 호수도 충분히 아름답긴 하다.

 

푸카키호수는 호수의 아름다움보다는 교회와 밤하늘로 유명한 곳이었다.

밤하늘은 진짜 인정.

그렇게 빼곡하게 박혀있는 별들을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참고로 난 시골출신에다가 군생활을 목포쪽에서 해서 친자연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만큼은 테카포호수의 압승이었다.

 

공교롭게도 테카포 호수를 떠나는 날에는 아침부터 눈이 왔다.

그래서 이곳의 랜드마크, 선한 목자의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테카포호수를 떠나서 남섬의 마운트 쿡이라는 산으로 향했다.

고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마치 산장과도 같은 백패커스에서 2박을 머물렀다.

대항해시대의 모험가 쿡 선장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쿡이겠지.

설산의 웅장한 트래킹코스를 즐기며 오랜만에 운동했다.

'

사실, 테카포호수나 마운트쿡 모두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지만 찾아가는 길이 더 아름다웠다.

버스를 타고 가서 차를 세울 수 없었지만, 자차를 몰고 다녔다면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싶던 장소가 부지기수였다.

 

 

 -홀스웰파크 Halwell Park

 

 

홀스웰 공원은 크라이스트 처치에 속해있는 평범한 공원이다.

이곳을 일부러 찾아갔던 이유는, 관련사이트에서 돌하루방이나 장승같이 우리나라 토속적인 아티팩트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크라이스트 처치가 송파구의 자매도시인 줄도 몰랐네.

 

공원자체가 훌륭했다.

과거 채석하던 현장도 있었고, 넓고 푸른 부지가 뉴질랜드스러웠다.

 

그리고 이 근처가 부촌이라 시내버스를 타고 가며 집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뉴질랜드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듯한 남쪽이 위로 올라간 세계지도.

실제로 이들은 남녀평등, 소수민족 공존 등 사회정치적인 관심이 높아서 이는 국가자부심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내 뉴질랜드 생활을 둘로 나눈다면, 80%의 암흑기와 20% 황금시대로 나눌 수 있다.

황금시대는 남섬 오타고 지방의 크롬웰에 살았을 때인데...

지금 이 포스팅에서는 시기적으로 절반씩 잘라내어 나눠 포스팅하려고 한다.

그래서 뉴질랜드 전반부는 여기서 마치고... 뭐 글을 읽어보신 분들이 느끼실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때까지 정신적으로 금전적으로 피폐해져있었다.

궁극적으로 '이러려고 온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롭게 회사를 박차고 나와서 해외에서 체류하려면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크라이스트 처치에서까지 실패한 나는 결국 4달여의 시간을 낭비하고 워홀러의 성지이자 무덤인 블레넘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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